갈천집(葛川集)》 서 -송시열
국가(國家)의 문치(文治)는 명종(明宗)ㆍ선조(宣祖) 무렵에 이르러 극에 달하였다. 그래서 도덕(道德)과 문행(文行) 있는 선비를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다. 그러나 큰 사화(士禍)를 당한 뒤이기 때문에 선비들이 임학(林壑)이나 호해(湖海) 사이에 많이 쳐박혀 있고 세상에 나와서 쓰이려 하지 않았다. 그러니 윗사람이 정성을 다해서 찾아내려 하는 경우가 아니면, 선비들은 차라리 초목(草木)과 함께 썩어 버릴지언정 벼슬아치들 사이에 어울리려 하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
나는 갈천 선생(葛川先生 임훈(林薰))의 유사(遺事)를 보고 나서 이성(二聖 명종(明宗)과 선조(宣祖))의 어진 이 좋아하는 정성이 치의(緇衣)보다 더했음을 알았다. 그러나 선생은 그렇듯 군신간의 좋은 제회(際會)를 만나 가지고도 마음속에 쌓아둔 무궁한 도덕을 다 펴지 못하여 후인(後人)으로 하여금 유한(遺恨)이 있게 한 것은 무슨 이유인가. 혹 시세(時勢)가 예스럽지 못하여 말이 서로 어긋남으로써 선생으로 하여금 어려움을 알아서 중지하고 간험(艱險)함을 보아서 그치게 했던 것이 아닌지, 이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학문(學問)과 연원(淵源)의 바름은 또한 상상할 만하다. 정 부자(程夫子)가 《대학(大學)》을 표장(表章)함으로부터 정심(正心)과 수신(修身)에 관한 설(說)이 모든 사람들의 입과 귀에 가득해졌는데, 이것을 마침내는 진부한 말[陳談]과 죽은 법[死法]으로 만들어 시군(時君)으로 하여금 듣기를 싫어하도록 하고, 심지어는 이 정심ㆍ수신의 설을 임금에게 말하지 말라고 주자(朱子)를 경계시킨 자까지 있었다. 그러니 스스로 앎이 밝고 믿음이 돈독한 사람이 아니면, 자신과 대등(對等)한 사람이나 그 이하 사람과 말하게 되더라도 오히려 이리저리 짐작하고 머뭇거리며 쉽게 말을 낼 수 없을 것인데, 더구나 군국(軍國)에 관한 모유(謨猷)와 문장(文章)에 관한 설(說)이 여기저기서 어지러이 진상(進上)되는 경연(經筵)에서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그러나 선생은 맨 처음 전석(前席 임금의 앞자리를 가리킴)에 올라가 홀로 이 적막한 정심ㆍ수신 등 두어 구절을 가지고 제가(齊家)ㆍ치국(治國)의 요도(要道)로 결정지었고, 범인(凡人)이나 속학(俗學)들이 자신을 오활하다고 여길 것은 돌아보지 않았다. 이야말로 성인의 말은 반드시 믿어야 하고, 삼대(三代 하(夏)ㆍ은(殷)ㆍ주(周))의 정치는 반드시 회복되어야 하며, 진부한 상담(常談) 가운데 반드시 스스로 묘리(妙理)가 있고, 사법(死法) 가운데 능히 반드시 스스로 활법(活法)이 있다는 것을 환하게 안 다음에야 능히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명종대왕과 선조대왕의 학문이 참으로 요순(堯舜)ㆍ공맹(孔孟)의 심법(心法)을 얻지 못하였던들 어찌 선생의 말을 싫어하지 않고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선생은 어진 이 얻는 것을 급선무로 여겨 퇴계 선생(退溪先生)이 조정에서 떠난 것을 매우 애석하게 여겼고, 민심(民心)에 순응하는 것을 급선무로 삼아 시정(時政)이 자꾸 저하되어 가는 단서를 극언(極言)하였는바, 모두가 조리(條理)가 있어 공언(空言)이 되지 않았으니, 이것이 어찌 융통성 없는 고루한 학자들의 구부러진 학문에 비교할 바나 되겠는가.
이 때문에 그의 학문이 두 번 전해져서 동계(桐溪) 정 문간공(鄭文簡公 문간은 정온(鄭蘊)의 시호)을 얻었는바, 그의 충효(忠孝)와 대절(大節)이 세도(世道)를 붙들어 세움으로써 온 인류(人類)로 하여금 이적(夷狄)이나 금수(禽獸)가 되기를 부끄럽게 여기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선생의 도(道)가 비록 당시에 크게 행해지지 못하였을지라도 후세인 오늘날에 와서는 그 은택을 받지 않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선생의 증손(曾孫) 모(某)가 병화(兵火)를 입은 나머지에서 선생의 유문(遺文)을 수습(收拾)하여 약간편(若干篇)을 얻어서 나에게 서문을 써 달라고 요청하였다. 내가 비록 감히 쓸 수는 없으나 또한 감히 끝내 사양할 수 없기 때문에 삼가 이와 같이 그 큼직한 행적만 간추려 보았다. 그리고 그 선생의 문사(文辭)가 고아(高雅)하거나 하속(下俗)한지에 관해서는 스스로 아는 자는 알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가지고 선생을 논할 바는 아니다.
숭정 을사년(1665, 현종6) 10월 3일에 은진 송시열은 쓴다.
葛川集序
國家文治。至於明宣之際而極矣。道德文行之士。指不勝屈。然亦當斬伐銷鑠之餘。故士多處林壑湖海之間。不肯出爲世用。非在上之人盡誠搜剔。則寧草木同腐而不肯俯仰於簪紳纓紱之間也審矣。吾於葛川先生遺事。知二聖好賢之誠。不翅如緇衣也。然以先生之遭遇。而不得展盡所蘊。使後人不能無遺恨者何歟。或無乃時勢不古。做說相乖。使先生知難而已。見險而止歟。是未可知也。然其學問淵源之正。仍亦可想。自程夫子表章大學正心修身之說。布滿口耳。遂作陳談死法。至使時君厭聞。而至有戒朱子勿言於上者。自非知之明信之篤。則自敵以下言之。猶且囁嚅斟酌。發之不易矣。況於廣廈細氈之上。軍國之謨。文章之說之交亂雜進之間哉。而先生初登前席。獨以此寂寥數句。決定以爲齊治之要道。不顧凡人俗學之見以爲迂闊。斯乃灼然見得聖言之必可信。三代之必可復。常談之中。必自有妙理。死法之中。必自有活法。然後乃能如是焉耳。然非我明宣聖學眞得堯舜,孔孟之心法。又烏能嘉悅而不厭哉。且先生以得賢爲急。而深惜退溪先生之去。以順民爲先。而極言時政損下之端。擧有條理。不爲空言。斯豈拘儒曲學之所可髣髴者哉。以故其學一再傳而得桐溪,鄭文簡公。忠孝大節。扶樹世道。使生人之類。恥爲夷狄禽獸之歸。然則先生之道。雖不大行於當時。而今後世不可謂不受其賜矣。先生曾孫某收拾遺文於兵燼之餘。得若干篇。俾余題其首。余雖不敢當。而亦不敢終辭。故謹撮其大者如此。若其文辭之高下雅俗。則自有知者知之。然非所以論先生者也。時崇禎乙巳陽月三日。恩津宋時烈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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