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글 (인생)

연암박지원의 '백자증정부인박씨묘지명(伯姉贈貞夫人朴氏墓誌銘)’

임공이산 2017. 10. 2. 12:56

 

 

 

기행의 인물 연암박지원!

형식과 틀 규범 따위에 얽매이지 않는 파격적 행보로 조선 최고의 임금 정조로 부터도 수차에 결쳐 경고를 받았던 영원한 자유인 연암박지원!

그를 중심으로 뭉친 실학사상 북학파들은 위대한 진보인들 이었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소위 종북좌파라 불렸을 아웃사이더였지만 시대를 앞서간  훌륭한 선각자들이었습니다.

연암이 1792년 우리 고향 안의현감으로 부임했을 때는 청나라 황제를 알현하러갔던 열하의 여행길에서 보고 배운 견문을 바탕으로 수차를 응용해 물레방아를 만들어 이용하였으니 이는 대표적 이용후생 (利用厚生)입니다.

집권세력 노론파에 속하면서도 기득권을 탐하지 않고 중인 서얼 상민 백정을 막론하고 신분과 계급을 초월해 인맥을 쌓고 교류한 조선의 기인 연암선생의 글 ‘백자증정부인박씨묘지명(伯姉贈貞夫人朴氏墓誌銘)’ 을 감상하며 민족 최대의 명절 추석의 의미를 되새겨 봅니다.

 

저도 연암선생과 매우 흡사한 누님에 대한  애닮은 사연이 있어 남다른 감상을 가집니다.

돌아가신 조상님의 은덕을 기리는 차례는 물론이요 부모 형제자매들끼리 오순도순 가족애를 나누는 명절이어야겠습니다.

절대로 명절을 잘못 쇠어 형제간에 부부간에 다툼으로 번지는 안타까운 후유증은 없어야겠습니다.

 

 

 

 

 

 

떠나는 이 정녕코 뒷 기약을 남기지만       (去者丁寧留後期)

오히려 보내는 자 눈물로 옷깃을 적시거늘 (猶令送者淚沾衣)

저 조각배 이제가면 언제나 돌아올꼬        (片舟從此何時返)

보내는 자 하릴없이 언덕 위로 돌아오네    (送者徒然岸上歸)

  -연암 박지원(燕巖 朴趾源) -

 

누님의 상여를 떠나보내며 쓴 연암선생의 묘지명 말미의 한시입니다.

불세출의 천재 연암도 평소 어머니처럼 따랐던 여덟 살 위 누나의 죽음이 서러워 차마 떠나보내지 못해 눈물로 옷깃을 적셨던 모양입니다.

 

조선시대 산문의 백미(白眉)라는 찬사를 받는 연암의 이 묘지명의 정확한 명칭은 백자증정부인박씨묘지명(伯姉贈貞夫人朴氏墓誌銘)이라고 한답니다.

묘지명이란 죽은 사람의 족보, 신분, 생전의 행적 따위를 객관적으로 기록한 글로, 보통 돌등에 새겨 무덤 속에 넣는답니다.

묘지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며 앞부분에 죽은 이의 신분 족보와 행적을 산문형식으로 서술해 이를 지(誌)라 하고, 뒷부분은 죽은 이에 대한 운문형식의 칭송글로 이를 명(銘)이라고 한답니다.

 

아래글은 묘지명 중 지(誌) 부분을 번역한 인용문입니다.

유인(孺人) 휘(諱) 모(某)는 반남 박씨인데, 그 동생 지원(趾源) 중미(仲美)가 다음과 같이 묘지명을 쓴다.

유인은 열여섯에 덕수 이씨 택모(宅模) 백규(佰揆)에게 시집가 딸 하나와 아들 둘을 두었으며 신묘년 9월1일에 세상을 뜨니 나이 마흔셋의 나이를 얻었다. 지아비의 선산이 아곡이라장차 그곳의 서향 언덕 묏자리에 장사 지내려한다.

(자형)백규가 어진 아내를 잃고 가난하여 살아갈 도리가 막막해 어린 자식들과 계집종 하나를 이끌고 솥단지 옷가지상자 따위 짐 궤짝을 끌고 배를 타고 (아예) 산골짝으로 들어가 살겠다고 상여와 함께 출발하였다.

나는 새벽에 두뭇개 나루(斗浦)의 배에서 그를 전송하고 통곡하다 돌아왔다.

 

아아! 누님이 시집가던 날 새벽 얼굴을 단장하시던 일이 어제 일만 같구나. 나는 그때 막 여덟 살이었는데 (누나가 시집가는 것이 서운하고 분해서) 벌랑 드러누워 발버둥을 치다가 새신랑의 말투를 흉내 내 더듬으며 점잖을 빼 말을 하니, 누님은 그 말에 부끄러워하다 그만 빗을 내 이마에 맞추었다.

나는 성이나 울면서 먹을 분통에 섞고 침으로 거울을 더럽혔다. 그러자 누님은 옥오리 금별 따위의 노리개를 꺼내주면서 나를 달래 울음을 멈추게 했다.

지금으로부터 스물여덟 해 전의 일이다.

 

말을 세우고 멀리 강위를 바라보니, 붉은 명정이 펄럭이고 배 그림자는 아득히 흘러가는데, 강굽이에 이르자 그만 나무에 가려 다시는 보이지 않았다.

그 때 문득 강 너머 멀리 보이는 산은 검푸른 빛이 마치 누님이 시집가던 날 쪽진 머리 같고, 강물 빛은 당시의 화장거울 같았으며, 새벽달은 누님의 눈썹 같았다.

울면서 그 옛날 누님이 빗을 떨어뜨리던 걸 생각하니, 유독 어릴 적 일이 생생하게 떠올라 기쁨과 즐거움이 많았으며 세월도 느릿느릿 흘렀었다.

그 뒤 나이 든 긴 세월을 이별과 슬픔에 괴로워하고 가난과 곤궁을 근심하다 훌쩍 시간이 지나갔거늘 덧없기가 마치 꿈결만 같구나. 형제로 지낸 날들이 어찌 이다지도 짧았더란 말이더냐.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5)

 

 

 

거침없이 세상을 살았던 연암도 여린 내면 감상의 소유자임이 이 한 편의 슬픈 애가(哀歌)에 여실히 드러납니다.

신묘년 9월 1일이라함은 1771년 음력 구월 초하루이니 추석을 지내고 보름이 지난 가을날이었을 것입니다.

지금의 옥수동 동호대교 어디쯤 이었다는 두뭇개 나루에서 죽은 누님의 상여를 싫은 배를 떠나 보내는 심정과 정경이 간략하나 잘 묘사되어있습니다.  가난한 선비 자형네 집안으로 출가한 박복한 누님이 죽자  평생 글읽을 줄밖에 모르는 무능한 자형은 초상마저 제대로 치루지 못하고 상여와 궁상스런 살림집기를 배에 싣고 실길을 찾아  강물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몰락한 양반가문이란 명분밖에 가진 것이 없는 연암 또 한, 상여를 부여잡고 통곡을하는 것 밖에 달리 도와 줄 것이 없습니다. 

그렇게 이별하는 스산한 가을날의 새벽강은 이승과 저승의 경계요 아름다운 추억의 과거와 팍팍한 현실을 갈라놓고 있는 매정한 강입니다.

그러나 글 중에서 시집가는 누나를 놀려먹고 땡깡 부리던 어린날의 추억을 생생히 묘사하는 장면은 해학과 유머 본능을 살린 파격입니다.

역시 연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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